"이공계가 아닌 사장 안된다. 최고를 위한 혼다" | |||
이공계가 이끌어온 일본 제조업 신화(1) | |||
혼다는 우리의 시각을 사로잡는 ‘1등 기업’이 아니다. 2006년 매출액 10조1천626억 엔(약 85조원), 순이익은 6천643억 엔(약 5조 4천억 원)을 기록한 일본 2위의 자동차 업체다. 매출과 순이익으로 따져 보면 1위인 도요타의 딱 절반 수준이고 매출액으로는 일본 전체 기업 가운데 20위권, 순이익은 10위권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 자동차 시장 점유율은 도요타 44퍼센트, 닛산 16퍼센트, 혼다 15퍼센트 순이다. 심지어 혼다는 한국의 현대-기아자동차에도 뒤진다. 2006년 전 세계에 340만 대의 자동차를 판매해 한국의 현대 기아차에 이어 판매 대수로 세계 9위다. 사실 혼다는 자동차와 모터사이클 외에 전력용 발전기와 모터보트도 생산한다. 이 가운데 자타가 공인하는 혼다의 ‘자랑’이라면 모터사이클이다. 모터사이클에선 911만 대(2003년)를 팔아 부동의 세계 1위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양적으로만 따지자면 혼다는 자동차 분야의 메이저 플레이어라고 하기가 어렵다. 혼다는 질로 따져봐야 비로소 진가를 드러낸다. 특히 ‘엔진의 혼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혼다의 엔진 기술은 유명하다. 자, 그렇다면 혼다의 엔진 기술은 얼마나 대단한 것일까? 혼다는 자동차 레이싱의 최고봉인 포뮬러1(F1)에서 일본 자동차 업체로는 최초로 우승을 거머쥐었다. 혼다는 모터스포츠 참가를 계기로 기술 발전을 일궈냈을 뿐 아니라 후발 자동차 업체로서 ‘기술의 혼다’라는 확실한 이미지를 심어 줬다. 그래서 혼다는 특히 20-40대에 인기가 높다. 혼다는 창업할 때부터 시쳇말로 레이싱에 승부를 걸었다. 혼다는 뿌리부터 도전적인 자동차 기업인 셈이다. 창업주 혼다 소이치로(本田 宗一郞) 회장은 1946년 내연기관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했고, 1959년에 혼다 오토바이를 당시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던 TT 레이스에 내보냈다. 그리고 출전 3년 만인 1961년 1등에서 5등까지를 휩쓸어버렸다. 세계는 ‘앙팡 테리블’의 등장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혼다의 도전은 오토바이 경주 ‘따위’에 멈추지 않았다. 1962년, 일본의 어떤 업체도 서킷(circuit, 자동차 경주 전용 트랙)에 관심을 갖지 않던 시대에 “아무도 만들지 않으면 우리가 하자”면서 서킷을 세웠다. 그들은 네덜란드에서 서킷 전문가를 불러다가 21만 평에 이르는 스즈카 서킷을 만들었다. 혼다의 다음 행보는 정해진 것이었다. 1964년 독일 F1 그랑프리 출전을 선언했던 것이다. 혼다의 첫 번째 자동차인 S500이 양산에 들어간 지 1년밖에 안 된 시점. 그것은 분명 무모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다. 1964년 독일 그랑프리 대회에서는 페라리, 로터스, 포르쉐 등 그 이름만으로도 기가 질릴 레이싱 카들이 총 출동했다. 물론 혼다는 레이스를 완주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1년 뒤, 혼다는 그랑프리를 따내고야 말았다. “우리의 모토는 ‘제일 곤란한 길’을 골라서 걷는 것이다. 승부 결과 따위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우리는 오로지 결과를 분석해서 품질을 높이고, 좀 더 안전한 자동차를 고객에게 선보일 것이다. 혼다는 보다 나은 새 차를 만들기 위해 그랑프리 대회에 출전한 것이다.” 혼다 소이치로가 첫 우승 소감을 묻는 기자 회견에서 내뱉은 사자후다. 소이치로의 말대로 혼다의 도전은 그 이후에도 계속됐다. 1993년, 혼다는 포뮬러1에서 오랜 독주로 경쟁자가 없어지자 철수하고 더 거친 미국의 인디레이스에 도전했다. 혼다 엔진은 1996년 치프 가내시, 헐 레이싱 팀 등에 우승을 안겨주었다. 1992년에는 태양에너지를 이용하는 태양전지 자동차 경주에 눈을 돌려 세계 대회를 휩쓸었고, 2003년 10월 열린 호주의 솔라 카(solar car) 랠리에서도 신형 드림호로 우승을 차지했다. 밑바닥에서 시작한 혼다의 역사 한국에는 도요타나 소니의 그늘에 가려 별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혼다는 일본 기업 가운데 종업원 개인의 특성을 마음껏 발휘하는 회사로 통한다. 직원들의 숨어 있는 창조력을 개발하는 데 힘써 일본 기업 가운데 소니와 더불어 가장 자유로운 기업문화를 갖고 있다. 혼다는 90년대 후반부터 ‘꿈의 힘(The Power of Dreams)’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기술과 창조, 글로벌화를 강조하는 혼다정신(혼다이즘)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 일본 외 30개국에 120개 이상의 생산 공장과 지사를 운영하고 있다. 또한 혼다는 소유와 경영을 철저히 분리한 회사로도 유명하다. 창업자 소이치로가 은퇴하면서 대부분 주식을 회사에 무상 증여했다. 이후 혼다 이사회에는 혼다 성을 가진 임원이나 감사가 단 한 명도 없다. 독자적인 경영위원회에서 오너 집안의 입김이 배제된 채 사장을 선발한다. 이사회에서 선출된 사장이 모든 권한을 갖고 투자, 신제품 개발 결정을 할 뿐 아니라 사업부마다 의사 결정 과정이 완벽히 분권화되어 있다. 가장 일본다운 기업이면서도 소유와 경영 측면에선 가장 서구적인 기업으로 평가받는다. 혼다의 창업자 혼다 소이치로(本田宗一郞, 1906∼1991)는 일본인들이 가장 존경하고, 본받고 싶어 하는 신화적인 인물이다. 그는 1906년 일본 중부지역인 시즈오카 현 하마마츠(浜松) 시의 작은 마을에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0대부터 아트상회라고 하는 자동차 수리공장에서 실력을 쌓으며 자동차 레이싱 꿈을 키워왔다. 20대에는 포드 엔진에 슈퍼차저(super charger, 고출력을 위해 엔진에 더 많은 공기를 강제로 넣어주는 장치)를 단 독창적인 레이싱카를 제작해 트랙 레이스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는 1929년 직원 한 사람과 함께 아트상회 분점을 내고 독립한다. 이것이 오늘날 혼다의 모체다. 그리고 일본이 패전하고 3년 후인 1948년 9월 하마마츠에서 자본금 100만 엔으로 오토바이(모터사이클)를 만드는‘혼다기켄코쿄(本田技硏工業)’를 설립한다. 본격적인 혼다의 시작이다. 이미 그는 자전거에 발전기 엔진을 단 동력 자전거를 개발, 주목을 받았다. 당시 대부분 일본 업체들이 미국, 영국 등 외국회사와 합작으로 자동차, 오토바이를 만들고 있었으나 소이치로는 독자기술을 고집했다. 그의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였지만 기술에 대한 집념으로 이를 극복, 어떤 기술자보다도 높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창업 후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오토바이 ‘드림’에 이어 혼다의 대명사가 된 소형 오토바이 ‘슈퍼카브’를 개발, 급성장했다. 자동차 사업은 오토바이 기술을 바탕으로 1962년 처음 시작했다. 당시 정부에서 신규 자동차 업체를 규제할 움직임을 보이자 혼다는 재빨리 자동차 사업에 손을 댄 것이다. 소형 스포츠카 S500과 S360으로 자동차 시장에 명함을 내민 혼다. 그들이 처음으로 내놓은 대중적인 양산차는 N360이었다. 1967년 첫 출시 후 20개월 동안 20만 대가 팔리는 성공을 거두면서 혼다는 후발 자동차업체 가운데 주목받는 기린아로 등장한다. 그 후 1971년에는 경차 ‘라이프’, 1972년에는 그 유명한 소형차 '시빅(Civic)'을 내놓아 세계적인 자동차 업체로 발돋움한다. 혼다의 대표적인 차는 소형차 시빅이다. 이 차는 미국에서 인기를 끌어 1995년 1천만 대를 돌파했다. 중형 세단 어코드도 2003년까지 1천3백만 대가 넘게 팔렸다. 어코드는 1989∼91년 세 차례에 걸쳐 미국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1997년 등장한 신형 어코드 역시 지금까지 매년 포드 토러스, 도요타 캠리와 베스트셀러 자리를 다투고 있다. 혼다는 일본 자동차 회사 가운데 미국에 가장 먼저 진출했다. 1982년 40억 달러(약 4조 8천억 원, 누계치)를 투자해 오하이오 주에 공장을 설립했다. 이후 글로벌 전략에 박차를 가해 캐나다. 유럽, 동남아시아에 현지 공장을 건설했다. 90년대 후반부터는 미국, 캐나다, 태국 등에서 생산한 차를 일본에 역수입해 팔고 있다. 최근에는 중국 공장 건설에 주력하고 있다. 혼다는 또 1980년대 후반부터 자동차 레이싱의 최강인 포뮬러(F1)에서 6회 연속 우승해 ‘기술(엔진)의 혼다’라는 명성을 얻었다. 기술을 중시하는 혼다의 정신(혼다이즘)은 바로 창업자 혼다 소이치로의 유산이다. 창업자 혼다 소이치로(本田宗一郞) 사장은 1973년에 고문으로 물러나면서 소유 주식의 대부분을 회사에 내놨다. 현재 혼다 회사에는 혼다 일가가 한 명도 없다. 이 같은 전통에 따라 지금까지 배출한 사장 5명이 모두 이공계 출신이다. 현 후쿠이 다케오(福井武雄) 사장은 와세다대 응용화학과 출신이다. 전임 요시노 히로유키(吉野浩行) 사장은 동경공업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했다. 자동차업계 관계자는 “혼다에선 이공계 출신이 아니면 사장이 될 수 없다는 게 불문율”이라며 “일본에 기술 중시 기업은 많지만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내는 면에선 혼다를 따라올 기업을 찾기 어렵다”고 말한다. 혼다는 회사 이름에서도 기술 중시가 드러난다. 영문 이름은 '혼다모터컴퍼니’지만 일본에선 창업 당시 이름인 혼다기켄코쿄(本田技硏工業)를 그대로 쓰고 있다.(계속) | |||
/중앙일보 김태진 기자, 니혼게이자이 한국특파원 스즈키 쇼타로 |
기술밖에 몰랐던 '신화' 혼다 소이치로 | |||
이공계가 이끌어온 일본 제조업 신화(2) | |||
이런 평가 뒤에는 혼다를 키워낸 불 같은 열정뿐 아니라 아름다운 퇴진이 있었기 때문이다. 1973년 10월 소이치로 사장과 창업 동지인 후지사와 부사장은 동시에 퇴임했다. 당시 소이치로가 67세, 후지사와가 63세였다. 나이로는 적당했지만 소이치로의 존재감은 절대적이었다. 그래서 그가 죽을 때까지 영원히 사장으로 있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런데 그는 훌쩍 그만뒀다. 그것도 보통 회장으로 물러나 앉아 이것저것 간섭하는 형식이 아니라 경영 일선을 완전히 떠난 것이다. 후지사와 다케오(藤澤武夫) 부사장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동반 퇴직은 그를 신화로 만든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소이치로와 후지사와는 퇴임이 결정된 후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혼다 사사[社史]에서) “그저 그런 정도로군.”(소이치로) “네, 그럭저럭.”(후지사와) “이쯤에서 괜찮겠지.” “글쎄요, 그렇게 하지요.” “행복했어.” “정말 행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도 감사해, 괜찮은 인생이었어.” 아무리 천재적인 기술자고, 카리스마 있는 경영자라도 언젠가는 은퇴할 때가 온다. 그런 때를 놓칠 경우 늙어 쇠잔해진 추한 모습을 보이기 쉽다. 일본에는 소이치로처럼 결단을 내리지 못한 경영자가 많다. 그래서 소이치로의 퇴진은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다. 소이치로는 사장에서 퇴임하기 2년 전인 1971년 4월 혼다기술연구소 사장을 그만뒀다. 젊은 기술자들에게 더 이상 자신의 지식을 고집해서는 안 되겠다는 판단에서다. 그는 이후 혼다의 사장으로서, 혹은 무언가 다른 지위를 갖고 죽을 때까지라도 자동차 개발에 관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런 미련을 싹 끊은 것이다. 한국의 창업자 가운데도 퇴직할 때를 놓쳐 추한 모습을 보인 경우가 꽤 있었다. 쇠약한 기운이 역력해지면서 자식 간에 경영권 싸움이 벌어진 경우도 허다하다. 물러날 때 물러날 줄 아는 용기 있는 경영자는 아름다운 은퇴와 신화를 만든다. 그는 저승으로 가는 길도 남달랐다. 1991년 8월 5일 간암으로 8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조문은 도쿄 저택에서 집안 가족끼리만 치러졌다. 다른 외부 조문객은 들여보내지 않았다. 재정계로부터의 화환도 거절해서 대부분 그대로 가지고 돌아갔다고 한다. 장례식도 가족, 친척들과 혼다의 역대 사장들만이 참석한 가운데 치러졌다. 그는 생전에 장례식과 관련하여 이렇게 당부했다고 한다. “자동차를 만들고 있는 내가 거창한 장례식을 치러 교통정체를 일으키는 어리석음은 피하고 싶다.” 그는 죽기 전에 소유와 경영을 독립시켰다. 평소 ‘회사는 내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소신대로 창업부터 고락을 함께 해 온 형제를 사직시켰다. 이후 자녀뿐만 아니라 친척도 혼다에 입사시키지 않았다. 그 전통은 아직까지도 철저히 지켜지고 있다. 혼다 임원 가운데 혼다 성을 쓰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도요타와 비교하면 너무나도 다른 이야기다. 기술밖에 몰랐던 소이치로 소이치로는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잠자는 것도 잊어버렸다고 한다. 모든 일을 잊어버리고 오로지 연구에만 열중했다. 40대까지만 해도 3일 밤낮을 먹고 자는 것을 잊어버리고 연구에 몰두했다. “엔진을 생각하면 머릿속에서 엔진이 돌아가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잠을 잘 수 없었다.”(자서전 『나의 생각』에서) 그가 연구에 빠져 남긴 일화는 여러 가지다. 가족 행사 등 반드시 참석해야 할 일이 있을 때 소이치로의 부인은 가는 종이에 메시지를 적어 그의 안경에 매달아 뒀다. 그렇지 않으면 연구에 몰두하다 잊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안경에 매달린 메시지를 보고 나서야 약속시간에 맞춰 덥수룩한 모습으로 연구실을 나왔다고 한다. 그는 정규 학력은 짧았지만 엔진 설계에 관한 한 최고의 기술자로 꼽혔다. 머릿속에서 생각이 넘쳐나면 손동작이 따라가질 못했을 정도였으니 두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소이치로의 설계방식은 이랬다. 아무것도 없는 백지에다 선을 긋고 그 다음에는 무언가 복잡한 엔진 구조가 나오고 마지막에는 그전 기술을 뛰어넘는 획기적인 형태가 됐다. 직감력도 대단했다. 엔진 설계를 하고 있는 부하 직원 뒤로 슬그머니 와서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연필로 거세게 X자를 그어 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예리한 직감으로 설계의 문제점을 한눈에 파악했기 때문이다. 소이치로의 기술에 대한 열정은 혼다의 기술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그는 연구소 직원들에게 항상 기존 수준을 뛰어 넘는 무리한 기술을 요구했다. 1960년대 혼다의 최고 히트작인 오토바이 '슈퍼카브'도 이런 정신에서 나왔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오토바이 슈퍼카브는 기어 변속을 왼쪽 페달로 가능하게 한 첫 제품이다. 지금은 상식적인 왼쪽 페달 변속기는 그가 개발 초기부터 '국수집 배달원인 형이 한손으로 운전할 수 있는 오토바이를 만들겠다'라는 목표에서 시작됐다. 슈퍼카브는 엔진 또한 혁신적이었다. 배기량 50cc에 4기통 엔진이었던 것이다. 당시 세계 오토바이 업계에서는 50cc라면 누구라도 2기통이 상식이었다. 하지만 기존 제품은 소리가 시끄럽고, 힘(마력)도 약했다. 이런 상식을 뛰어넘기 위해 소이치로는 4기통 개발을 지상 명제로 삼았다. 연구원들이 '도저히 이렇게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면 불벼락이 떨어졌다. '해보지 않고 어떻게 알아'라며 그의 입에선 욕이 튀어 나왔다. 막무가내인 그를 직원들이 따랐던 이유는 철저히 솔선수범했기 때문이다. 기술자들과 함께 먹고 자면서 개발을 계속한 그를 부하 직원들이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슈퍼카브는 1958년 시판 이래 40년간 마이너체인지를 거듭하며 1999년 1월로 2천746만 대를 넘어서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오토바이가 됐다. 그의 개발에 대한 열정을 알기에 직원들은 맞으면서도 '사장님, 사장님' 하고 따르며 연구를 도왔다. 사람 생명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자동차를 개발, 생산하면서 게으름이나 대충대충은 그에게 있어서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다.(계속) | |||
/중앙일보 김태진 기자, 니혼게이자이 한국특파원 스즈키 쇼타로 |
소이치로 “놀기 위해서 일한다” | |
이공계가 이끌어온 일본 제조업 신화(3) | |
소이치로는 일에서 만큼은 엄격했지만 노는 것은 매우 호쾌했다. '놀고 싶은 욕구가 없다면 새로운 발상은 나올 수 없다. 일을 잘해야 잘 놀 수 있다'는 것이 놀이에 대한 신념이었다. 놀이가 일의 에너지가 되고, 일이 놀이의 에너지가 된다. 그는 큰 목소리에 쾌활한 웃음으로 술자리에서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50대까지 기생을 모아 놓고 떠드는 것은 보통이고, 젊은 사원을 데리고 이자카야(선술집)부터 고급 요정까지 어디라도 갔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술값은 철저히 사비를 사용했다. 회사 돈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장이라는 신분에 구애받지 않았다. 술자리에서 부하 직원들의 직위를 부르기 보다는 ‘oo씨, oo군’으로 대하면서 술을 주고받았다. 한국의 오너가의 풍토와 비교하면 참으로 특이한 인생이다. 술에 취해 일어난 일화도 무수히 많다. 젊었을 때는 심지어 기생을 2층 창에서 내던지기도 했다고 한다. 무슨 술주정이 그리 심하냐고 생각할 만큼 난폭한 이야기지만, 그 기생은 전선에 걸려서 구조됐다. 또 기생을 자신의 차에 태우고 가 근처 개울에 내던진다든지 하는 등의 주사(酒邪)가 셀 수 없이 많았다. 사람을 좋아해 북적거리는 술자리를 즐겨했던 그는 부인도 종종 회식 자리에 데리고 갔다. 그리고 부인을 기생들 사이에 앉히고 함께 춤을 추기도 했다. 그리고는 ‘나는 이렇게 놀기 위해서 일을 하는 거야’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혼다 소이치로의 『나의 생각』에서) 적당히 놀고 도가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이것저것 가려서 일을 하는 공무원이나 샐러리맨은 세계를 놀라게 하는 발명이나 발상을 할 수 없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하루 24시간이라는 공평함을 주기 때문이다. 시대가 아무리 급변하더라도 호쾌하게 놀고, 철저하게 일을 하는 사람 가운데서 참신한 발상이 나오는 것은 어느 시대나 같다. 세계를 바꾼 발명가나 기업가들에서 이런 공통점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IMF 관리체제 이후 한국에는 이런 호쾌함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정치가, 경영자, 예술인들 사이에도 ‘호쾌’라는 단어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한국 경제의 침체는 이런 점에서 점점 더 다가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이치로와 정주영 소이치로의 인생은 한국의 대표 기업인 현대를 키워낸 고(故) 정주영 회장과 비슷한 점이 많다. 그들은 전설처럼 살면서 수많은 일화를 만들어 냈다. 창업자답게 지칠 줄 모르는 불굴의 기업가 정신으로 거대 기업을 키워 냈다. 소이치로는 기술에, 정 회장은 사업 확장에 열성을 바친 사람이었다. 혼다는 일본 고도성장기와 함께 쑥쑥 커나갔다. 현대 역시 70년대 한강의 기적을 일궈냈다. 일에 대한 열정은 밤낮을 가리지 않았고 한번 일에 매달리면 만사를 제쳐두고 끝을 보는 성격도 비슷했다.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초등학교 교육밖에 받지 못했다. 가난한 시골에서 형제가 많은 집에 태어난 것도 똑같다. 그들은 현실에 안주하며 변화를 두려워하거나 실패 앞에서 낙담하지 않았다. 미래를 꿈꾸며 위기를 기회로 역전시켰다. 사람을 보는 눈도 탁월했다. 일단 믿어서 사람을 쓰면 철저히 맡겼다. 소이치로 곁에는 후지사와라는 최고의 살림꾼이 있었다. 그에게 대표이사 인감을 맡기고 도장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정 회장의 주변에도 그를 보좌했던 유능한 경영자들이 수두룩했다. 현대 그룹의 신화에는 박세용 회장 등 정 회장의 그림자들이 빛을 더했다. 두 사람은 확실한 카리스마로 부하를 이끌었다. 그들의 카리스마 뒤에는 탁월한 능력뿐 아니라 부하를 감쌀 줄 아는 인간성과 강인한 체력 그리고 지칠 줄 모르는 신념이 깔려 있었다. 뛰어난 카리스마를 갖고 있더라도 인간적인 매력이 없으면 반감을 산다. 이들은 강한 도전 정신 이외에 따뜻한 인간적인 매력으로 부하들을 사로잡았다. 세계 굴지의 현대중공업을 일궈낸 정 회장의 ‘5백 원 일화’는 유명하다. 1970년대 조선업을 시작하기 위해 투자처를 물색하던 정 회장은 거의 무일푼으로 영국의 투자회사를 찾았다. 그는 당시 5백 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을 내보이며 “한국은 16세기에 이 같은 배를 만들었다. 그런 기술을 바탕으로 세계 최고의 조선소를 만들겠다.”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누구도 성공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거액의 투자를 받아내고야 말았다. 영국 투자회사가 5백 원짜리 지폐의 거북선을 보고 돈을 준 것은 아닐 것이다. 정 회장의 집념과 ‘할 수 있다’는 강인한 기업가 정신을 높이 샀던 것이다. 소이치로 역시 마찬가지였다. 1950년대 파산 위기에 몰렸던 혼다를 구하기 위해 후지사와 부사장이 은행을 찾아 ‘혼다는 이번 위기를 넘기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수십 억 엔을 받아 왔다. 당시 아무런 담보도 없었다. 그 전까지 혼다가 보여준 기술에 대한 열정과 신뢰가 바탕이었다. 그들은 일을 못하는 부하 직원에게는 모두 불같이 화를 냈다. 심하게는 직원을 때리기도 했다. 어려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핑계를 대거나 편한 길을 찾으려 하는 직원을 만나면 발로 걷어차기도 했다. 또한 정도에서 벗어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소이치로는 기업가로서의 시작이 태평양 전쟁 전 도제제도(어려서부터 스승의 집에 기거하며 기술을 배우는 것)로 교육받았다. 따라서 자신의 기술만을 믿는 장인 정신으로 철저히 무장했다. 혼다의 모체인 아트상회 때 소이치로의 무서움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는 사원이 속출했다고 한다. 혼다가 대기업으로 성장한 후에도 소이치로는 마찬가지였다. 혼다가 1960년대 대량생산 체제에 돌입하면서 조립라인의 문제로 불량률이 높아지는 경우가 왕왕 생겼다. 소이치로는 이런 사태를 용납할 수 없었다. ‘바카야로(바보 같은 놈)’라고 소리를 지르며 주먹을 휘두르고, 그러다 성질을 못 이겨 주변에 있는 스패너와 해머까지 내던지기까지 했다. 소이치로의 물건 내던지기는 악명이 높았다. 스패너나 해머뿐만 아니라 손에 잡히는 것은 무조건 내던지며 화를 냈기 때문이다. 심지어 삼각자도 그의 손에 넘어가면 ‘흉기’로 돌변했다. 직원들은 결국 소이치로가 화를 낸다 싶으면 잽싸게 위험한 공구를 감춰버릴 수밖에 없었다. 정 회장도 그랬다. 그의 측근들 중에서 정강이를 맞아 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을 정도였다. 물건을 내던지는 것도 비슷했다. 거친 욕은 다반사였다. 그래서일까? 정 회장에게 단련 받은 현대그룹 경영진 중에는 욕을 잘 하는 사람이 많다. 급한 성격도 비슷했고 화를 내면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회사 그만 둬! 지금 바로 사표 써, 사표!” 두 사람 모두 이런 말을 자주했다. 이에 실망한 직원이 정말로 그만둘 생각으로 다음날 사표를 들고 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아니 내가 싫어서 그만둔다는 거야?”라고 어깨를 툭 치면 그만이었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바로 꿈을 이루고 말겠다는 불굴의 투지다. 할 수 있다는 신념과 이를 실천하려는 의지와 결단력이다. 한국 경제는 점점 저성장에 따른 구조적 불황에 빠져들고 있다. 소이치로와 정 회장의 인생에서 지금의 경제 위기를 헤쳐 나갈 묘수는 하나다. 그들이 줄곧 유지해왔던 ‘할 수 있다’라는 강한 신념이다. 그들의 불굴의 삶이 지금 희망 없는 한국인의 가슴에 부활해야 하는 것이다.(계속) | |
/중앙일보 김태진 기자, 니혼게이자이 한국특파원 스즈키 쇼타로 |
황금 콤비 소이치로와 후지사와 |
이공계가 이끌어온 일본제조업 신화(4) |
도쿄 아오야마의 혼다 본사를 찾아 직원들과 만나면 ‘경영의 귀재’ 후지사와 부사장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들을 수 있다. 소이치로를 내조해 오늘의 혼다를 만든 후지사와 다케오(藤澤武夫) 부사장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일본 경영학계 전문가들은 “후지사와가 없었으면 소이치로는 단순히 동네 자동차 공업사 사장으로 끝났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소이치로가 화려하다면 후지사와는 뒤에서 조용히 받쳐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서로가 없었다면 양쪽 모두 빛을 발할 수 없는 그런 콤비였다. 마치 쌍둥이처럼 두 사람의 호흡은 딱 맞았다. 도쿄 출생인 후지사와는 상술에 뛰어나 20살에 회사를 창업했다. 이들의 첫 만남은 혼다가 창업한 다음해인 1949년이다. 일본이 패전 쇼크에서 회복할지 아무도 몰랐던 그런 때였다. 기술에 자신이 있었던 소이치로는 판매와 자금을 맡아 줄 경영자가 필요했다. 그때 소문들 듣고 찾아낸 사람이 후지사와다. 소이치로가 42세 되던 해 도쿄에서 단둘이 만났다. 이들은 첫 만남에서 의기투합했다. 당시 소이치로는 창업 2년째인 혼다를 '세계 최고'로 키우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첫 만남에서 당당히 세계 최고의 자동차 회사, 아니 비행기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상식적인 경영자라면 먼저 일본 제일을 목표로 하고 그 다음 단계로 세계 최고를 목표로 할 것이다. 그런데 소이치로는 후지사와에게 '세계 최고가 아니면 일본 최고가 될 수 없다'는 역설적인 논리를 펼쳤다. 처음부터 세계 최고를 겨냥한다는 점에서 상식적인 경영자와 구분됐다. 그의 논리는 이랬다. 아무리 수입을 제한해도 좋은 외국상품은 반드시 일본에 들어온다. 좋은 상품에 국경은 없다. 일본 최고라 하더라도 외국의 좋은 상품이 수입되면 함께 경쟁해야 하므로 일본 최고는 의미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입품에 지지 않을 세계 최고의 상품을 만들면 틀림없이 일본 최고가 된다는 것이다. 후지사와는 그의 신념에 감동했고 그 자리에서 그를 따랐다. 후지사와를 영입한 소이치로는 기술과 생산만 담당했다. 후지사와는 재무를 포함한 경영 전반을 맡았다. 서로의 신뢰 관계는 은퇴할 때까지 30여 년간 단 한 번도 금이 가지 않았다. 소이치로와 후지사와는 개발과 재무라는 입장 때문에 종종 충돌도 있었다. 하지만 소이치로는 대표이사 인감을 맡겨 버린 이상 그를 철저히 신뢰했다. 후지사와 역시 소이치로가 ‘이런 공장을 세운다. 이런 기계를 산다.’라고 말하면 두말 않고 자금을 마련했다. 후지사와에게 소이치로는 혼자서 실현시킬 수 없는 꿈을 가능하게 해준 동반자였다. 그는 소이치로를 통해 자신의 꿈을 향해 매진했던 것이다. 그의 꿈 역시 ‘세계 최고의 자동차를 만드는 것’이었다. 콤비의 일화 1952년 소이치로는 4억5천만 엔(현재의 5백억 원)이 넘는 최신 공작기계를 수입하기로 결정했다. 새로운 오토바이를 개발하면서 정밀도가 높은 공작기계를 들여와 품질을 개선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때까지 조그만 오토바이 회사였던 혼다에겐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당시 자본금을 겨우 600만 엔으로 늘린 직후였다. 하지만 후지사와는 그런 거금을 배짱 좋게 마련해왔다. 자칫 잘못하면, 혼다가 망할지도 모르는 금액이었다(혼다는 이후 한동안 자금융통에 어려움을 겪었다). 후지사와는 거금을 빌리러 은행에 갈 때 비굴하게 머리를 숙이며 통사정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당당하게 “혼다는 틀림없이 세계 최고의 회사가 됩니다.”라고 막힘없이 혼다의 꿈을 이야기했다. 그 꿈을 믿지 않으면 은행이 아니라고 할 정도였다. 그런 꿈을 앞세워 은행에서 융자를 받아냈다.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5백 원 지폐의 거북선으로 거액의 투자를 받았던 것과 비슷했다. 기사회생의 전기가 된 오토바이 '슈퍼카브’ 개발에도 후지사와의 후원은 대단했다. 당시 여성을 쉽게 뒷자리에 태울 수 있고 스마트한 외관과 조용한 엔진, 게다가 고출력을 갖춘 오토바이는 없었다. 소이치로는 기존에 나온 오토바이 여러 대를 구입해 비교해보면서 ‘이런 걸까, 저런 걸까' 하고 후지사와에 물었다. 후지사와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기존의 것을 흉내 내어 조금 다르게 만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완전히 새로운 개념과 방식으로 개발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의 지적 앞에 소이치로는 수십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완전히 새로운 개념으로 슈퍼카브를 내놨다. 소이치로의 작품을 처음 본 후지사와의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소이치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봐, 전무(당시 후지사와는 전무였다.) 이거라면 어느 정도 팔릴까?” 그러자 후지사와는 별 일 아니라는 듯 이렇게 대답했다. “3만 대 정도는 팔리겠지요.” 당시 오토바이는 모든 메이커를 합해 한 달에 3만여 대 정도 팔렸다. 그의 대답을 들은 직원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이렇게 되물었다. “1년 누계 판매 목표 말씀이죠?” 그런데 후지사와가 소리 높여 내놓은 답변이 정말 걸작이었다. “바보 같은 소리 집어 쳐! 매달 3만 대는 충분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말에 소이치로도 놀라 눈을 부릅떴다고 한다. 후지사와의 말은 혁신적인 슈퍼카브의 성능이나 기술을 칭찬한 것만은 아니었다. 한 달에 3만 대를 팔아야 하는 목표를 세운 경영 책임자로서 결의였다. 그의 예언대로 슈퍼카브는 매달 3만 대 이상 팔렸다. 소이치로가 통이 큰 인물로 유명했지만 후지사와 역시 그에 못지않은 걸물이었던 것이다. 소이치로와 후지사와를 넘어서 1970년대 초반 대기업으로 변신한 혼다에는 반갑지 않은 대기업 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신차개발이라는 혼다의 생명과도 같은 업무에서 조직이 느슨해지고 ‘벤치마킹’이란 미명 하에 경쟁업체의 신기술을 베끼는 경우가 점점 많아졌다. 특히 소이치로가 사장에서 은퇴한 이후 개발 부문의 쇠퇴는 두드러졌다. 아직도 그의 카리스마에 의지하는 분위기가 만연했던 것이다. 개발 부문에서 젊은 기술자를 육성하고 있었지만 정신적으로 소이치로에게 의존하는 정도가 대단히 높았다. 그들은 새로운 학문으로 무장했지만 ‘혼다는 내 회사야’라는 소명 의식이 부족했다. 사람들 사이에는 “(소이치로는) 은퇴했지만 연구 마지막에는 무언가 해줄 것이다”라는 의존적인 생각이 팽배하여 끝까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버블 경기가 정점에 달했던 1989년 주력차종인 4세대 어코드가 첫선을 보였다. 미국에서 어코드는 명차로서 성공을 거뒀다. 신형 어코드 역시 판매 호조를 이어갔다. 문제는 일본이었다. 별로 팔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버블 경제의 영향으로 소비자의 기호는 중형차에서도 고급차와 같은 옵션 등으로 치장한 준고급차로 흐르고 있었다. 신형 어코드는 디자인 면에서 앞선 어코드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소비자의 실망감이 컸고 이는 곧바로 심각한 판매 부진으로 이어졌다. 혼다 내부에서도 “폭발적으로 팔렸던 어코드의 후속 차이기에 큰 모험을 하기 어려워 비슷한 디자인을 유지했을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안전지향과 무난함을 택한 것은 혼다의 유전자를 잃어버린 대기업병의 전형이었다. 경쟁사들이 무난함을 택했을 때 혼다는 늘 파격을 선택했었다. 그것이 혼다다움이었고 혼다의 유전자였다. 점점 혼다 마니아들 사이에도 ‘혼다에 젊음이 없어졌다’라는 말이 나왔다. 신형 어코드의 판매 부진이 이어진 데다 버블 경제가 붕괴하자 혼다의 실적이 눈에 띄게 떨어졌다. 승용차 판매는 1992년 2조262억 엔을 정점으로 93년 1조9천879억 엔, 94년 1조7천954억 엔, 95년 1조7천718억 엔 등 3년 연속 감소했다. 그나마 호조였던 미국 판매가 뒷받침했던 수치라 일본 판매는 더욱 참담한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미국 시장도 점점 어려워져 갔다. 미국의 ‘빅3’와 도요타의 반격이 거셌다. 더욱이 스즈카(鈴鹿)공장은 증설에 들어가 세 번째 라인이 완성됐다. 생산 능력은 대폭 올라갔다. 당시 위기를 느낀 혼다의 4대 사장 가와모토 노부히코(川本信彦)는 혼다의 유전자를 되찾기 위해 고민했다. 그는 소이치로로부터 직접 훈도(訓導)를 받은 마지막 세대였다. 그는 ‘혼다를 근본부터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위기감을 안고 1990년 6월 사장에 취임했다. 그는 먼저 ‘혼다 소이치로를 잊어라, 혼다는 보통회사가 된다.’ 라고 공공연히 얘기했다. 자유롭고 느슨했던 조직을 재구축하면서 대기업에 맞는 조직을 갖추기 시작했다. 소비자의 요구에 맞는 차, 그리고 판매력 강화가 중심이었다. 의사 결정의 신속화를 위해 결재라인을 줄이고 부장들에게 전권을 줬다. 그리고 엉클어진 조직을 추려 세계를 4개 지역으로 분할해 지역본부를 두고 자율 경영체제에 들어갔다. 결국 3년 만에 집단 지도체제에서 사장에게 권한을 집중한, 하지만 결재는 사업부 단위로 이뤄지는 간결한 조직이 만들어졌다. 조직을 정비했던 결과로 혼다다움을 보여준 공전의 히트작 오딧세이가 출시됐다. 혼다에겐 버블이 깨지면서 닥친 위기를 벗어나게 한 구세주였다. 새로운 핵가족 문화가 확장하면서 7인승 레저용차 오딧세이는 미국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대성공이었다. 당시 혼다 경영진은 ‘오딧세이가 아니었다면……’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 한다.(계속) |
“기술에 개발에 승부를 건 소니와 혼다” |
이공계가 이끌어온 일본 제조업 신화(5) |
혼다와 비슷한 기업 문화를 지닌 기업으로는 전자 업체인 소니가 우선 꼽힌다.일본 언론과 학계에선 ‘혼다는 소니’로, ‘도요타는 마쓰시타전기’로 자주 비교된다. 도요타와 마쓰시타는 일본 기업 가운데 역사가 깊은 고참 기업이다. 특히 일본식 경영, 보수적 사풍으로 유명하다. 90년대 후반까지 10여 년간 소니와 혼다가 잘 나가면서 일본식 보수 경영에 대한 경쟁력이 땅에 떨어졌을 때 도요타는 홀로 일본식 경영의 장점을 지켰다. 도요타는 첨단 기업으로 유명하지 않다. 그렇다고 앞선 기업을 그대로 모방하는 기업도 아니다. 보수적이지만 개성이 강한 기업이다. 마쓰시타는 한 번도 신제품을 소니보다 먼저 시장에 내놓은 적이 없었다. 항상 소니가 신제품을 내놔 시장을 만들었다. 그 다음 마쓰시타는 특유의 생산 기술로 그 제품과 비슷한 상품을 만들어 판매력을 앞세워 시장을 탈환했다. 그래서 붙은 이름이 ‘마네시다(‘마네’는 일본어로 모방)’다. 마쓰시타의 창업자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는 생전에 “우리 회사는 소니라는 세계 최고의 연구소를 갖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을 정도다. 어쨌든 도요타는 젊고 재빠른 혼다의 도전을 마쓰시타처럼 혼다를 또 하나의 자사 연구소로 활용하면서 특유의 생산기술과 판매력으로 1등을 지켜냈다. 도요타와 마쓰시타가 닮은 꼴이라면 혼다와 소니는 쌍둥이라고 할 수 있다. 두 기업의 역사뿐만 아니라 사풍과 기업 문화 등 비슷한 점이 많다. 실제로 소이치로와 소니의 창업자였던 이부카 마사루(井深大)는 은퇴 이후에 절친한 친구가 됐다. 소니는 혼다와 같은 해인 1946년에 창업했다. 동경통신공업이라는 그럴 듯한 이름으로 시작했지만 혼다와 비슷한 동네 공장 수준을 간신히 넘어선 정도였다. 소니는 그 후 일본 처음으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개발했다. 1979년에는 워크맨을 시판해 세계를 석권했다. 2000년 이후에는 PC 바이오가 호조다. 소니도 혼다와 마찬가지로 인간형 로봇을 개발, 혼다와 거의 동시에 발표하기도 했다. 소니는 가전분야에 특화(特化)하면서 참신한 컨셉과 독창적인 기능을 계속 선보였다. 워크맨, 카메라 일체형 비디오, CD, MD, 모바일기기 등 일일이 열거할 수가 없다. 경쟁사보다 앞서 재빨리 새로운 제품을 출시하고 시장의 화제를 독차지했다. 그런 점에서 독창적인 제품개발 위주인 혼다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또 일본 차 중 가장 먼저 미국 시장을 선점한 혼다와, 콜롬비아영화사를 인수해 콘텐츠 업체로 변신한 소니의 글로벌 전략, 그리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정신 등 사풍에 있어서도 공통점이 많다. 소니의 창업자 이부카 마사루는 소이치로와 같은 기술자였다. 경영 파트너인 모리타 아키오(盛田昭夫)는 혼다의 후지사와 부사장처럼 경영의 귀재였다. 이런 황금 콤비 역시 유사하다. 두 회사는 기술개발에 승부를 걸었다. 기술을 중시하다 보니 큰 실패를 경험한 것도 비슷했다. 혼다가 공랭엔진을 고집하다 수랭식으로 바꾼 것처럼 소니 역시 가정용 VTR 사업에서 베타방식을 고집하다 결국 마쓰시타의 VHS에 참담한 패배를 맛봐야 했다. 지극히 일본적인 경영을 고수한 것도 비슷했다. 첨단 기술을 갖고 있으면서 종신고용을 중요시하거나 종업원의 구심력은 철저히 일본적이었다. 그런 혼다와 소니는 90년 중반 이후 큰 차이점을 보인다. 소니는 본사에서 생산본부를 떼어내 소위 일본 제조업의 특기인 ‘물건 잘 만들기(모노 즈쿠리)’를 포기한다. 이런 경영 방식은 효율성과 생산비 절감에는 큰 효과가 있었지만 좋은 물건을 잘 만들었던 소니의 강점이 사라진 역효과도 동반했다. 2000년 이후 소니가 뒤늦게 이 점을 알고 방향을 수정하고 있다. 앞으로 소니의 미래가 궁금하다. 이에 비해 혼다는 기술 개발과 맞물려 철저하게 물건 잘 만들기를 고집해왔다. 과거, 현재, 미래에 변함없이 좋은 차를 잘 만들어 저렴하게 공급한다는 철학으로 일관하고 있다. 창업자를 통해 본 도요타, 혼다 도요타와 혼다 창업 일가를 비교해 보면 두 회사의 경영의 차이점을 알 수 있다.양사 모두 창업자의 이름을 회사명으로 하고 있지만 창업 일가에 대한 태도를 보면 정반대다. 도요타 일가는 도요타 경영의 키를 읽는 구심점이다. 그들의 영향력이 막강할 뿐 아니라 종업원들의 충성심도 어떤 회사보다 높다. 한마디로 말하면 도요타는 도요타 일가가 경영 멤버로 참가하고 있는 데 비해 혼다 일가는 일절 경영에 관여하지 않고 있다. 도요타의 경우 도요타 일가 이외에 오쿠다 현 회장과 조 후지오 사장 등이 잇따라 사장에 올랐지만 도요타 일가의 3세인 도요타 쇼이치로(豊田章一郞) 명예 회장의 장남인 아키오(章男, 현재 아시아 담당 전무)에의 ‘대정봉환(大政奉還)’이 공공연히 거론되고 있다. <*대정봉환은 1867년 당시 지배 세력이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 막부 정권이 싸움을 하지 않고 일본 천황에게 권력을 바친 것을 말함.> 이에 비해 혼다에선 혼다 일가의 임원 취임은 찾아 볼 수 없다. 혼다 일가를 회사 경영에 참가시키지 않는 것이 창업자 혼다 소이치로의 신념이기 때문이다. 소이치로는 이 점 때문에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처음 도입한 일본 경영자의 시조로 꼽힌다. 이러한 양사의 창업 일가에 대한 태도는 지극히 대조를 이뤄 흥미롭다. 도요타 일가는 도요타의 주식을 4퍼센트 정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도요타 가문은 대주주보다는 사내의 파벌 항쟁을 막고 사원의 구심력을 높이는 ‘천황가(일본의 왕)’와 같은 존재다. 도요타 가문이 있음으로 해서 쓸데없는 파벌 싸움을 미연에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닛산의 경우 80년대 후반부터 도쿄대 출신 간의 파벌 싸움으로 경영 에너지를 낭비, 파산 위기에 몰린 것이 좋은 예다. 현재 도요타 본사에는 아키오뿐 아니라 도요타 전 사장이었던 도요타 에이지(英二)의 삼남인 도요타 슈우헤이(周平)가 상무로 근무하다 2004년 계열사인 방적기 부사장으로 옮겼다. 그는 유럽 시장용으로 개발한 리터카 ‘야리스(일본명 빗츠)’의 개발책임자를 맡기도 했다. 또 도요타 일가는 도요타 본사뿐 아니라 계열사에도 흩어져 있다. 에이지의 장남 칸시로(幹司郞)는 도요타의 주요 부품업체인 아이신정기(アイシン精機)의 사장이다. 차남인 데츠로(鐵郞)는 현재 도요타자동직기(自動織機)의 부사장으로 그룹의 결속력을 다지고 있다. 도요타는 그룹 간의 결속 강화를 위해 오히려 도요타 일가를 적극적으로 등용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의 경우라면 도요타는 족벌 경영이라고 지탄을 받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모든 도요타 일가의 자손들이 경영에 참가하는 것은 아니다. 무능한 일가 친족이 경영의 톱이 되면 비참한 결과를 낳는 것이 현대 경영학의 교훈이다. 90년대 말 한국에서 IMF 관리 체제를 불러온 원인 중 하나는 경쟁력 없는 2,3세의 승계였다. 도요타는 능력이 떨어지는 친족은 철저히 경영에서 배제한다. 이런 원칙이 창업 일가 내부에서 철저히 지켜지고 있다. 특이한 점은 도요타 일가에서 경영권을 놓고 싸우거나 내 몫을 떼어 달라며 그룹에서 분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친족들이 모두 집결해 구심점이 되고 있는 것은 눈여겨 볼 부분이다. 필자는 이런 경영 방식을 벌떼 경영이라고 부르고 싶다. 한국 재벌 그룹의 풍토와는 상이한 점이다. 이에 비해 혼다의 경우 혼다 일가를 대하는 태도는 냉담하다. 소이치로의 장남 히로토시(博俊)는 모터스포츠 사업을 하는 주식회사 ‘무겐(無限)’의 대표이사다. 무겐은 혼다의 자회사였다가 1990년대 후반 완전 분리됐다. 현재는 혼다의 일개 거래처에 불과하다. 이 회사는 2001년 여름에 법인세법 위반, 이른바 탈세 의혹이 불거져 조사를 받다가 2003년에는 히로토시가 탈세혐의로 구속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2004년 7월 최종 선고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다. 창업 일가의 경영 참여라는 기준으로 보면 두 회사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한국 재벌 그룹의 경우 창업자 사후에는 형제나 자식들이 경영권을 놓고 다툼을 벌이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2세, 3세로 넘어오면서 기업을 분할해 독립하는 게 보통이다. 삼성, 현대, LG, SK 등 주요 그룹이 그랬다. 2세, 3세로 넘어오면서 형제 간에 자신의 몫을 떼어 내 모 그룹에서 분가한다. 이는 도요타에 비춰 보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도요타는 이제 4대째로 접어들고 있다. 형제나 삼촌 간의 분가는 없다. 오히려 분가보다는 도요타 일가가 힘을 합쳐 능력 있는 자손을 지속적으로 경영에 참가시켜 구심점을 만들고 있다. 자동차 사업이라는 가업을 잘 이어갈 수 있는 능력 있는 자손을 찾아 훈련시키는 게 먼저다. 도요타 이외에 일본의 유명 제조업체들은 아들이 없을 경우 사위를 호적에 올려 가업을 잇게 했다. 자식의 승계보다는 가업을 잘 잇는 것이 더 중요한 포인트다. 마쓰시타 전기가 대표적이다. 사위를 통해 대를 잇고 이제는 최고 경영자들이 사장을 맡고 있다. 그렇지 못할 경우 가장 믿을 만한 부하에게 승계시킨다. 혼다의 경우가 그렇다. 또 도요타가 어려움이 닥치면 전문경영인에게 사장 자리를 넘겨주고 다시 돌려받는 것도 이런 풍토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한국 기업들이 곱씹어봐야 할 포인트가 여기에 있다.(계속) |
창업자의 무덤에서 볼 수 있는 차이 |
이공계가 이끌어온 일본제조업 신화(6) |
도요타와 혼다의 창업자의 무덤은 두 회사의 사풍만큼이나 다르다. 도요타 일가의 무덤은 나고야 시내 조그만 절인 가쿠오잔 닛타이지(覚王山日泰寺)에 있다. 태국 국왕으로부터 기증 받은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1962년 건립한 일본의 유일한 초종파적 사원이다. 절 자체의 외관과 시설은 대단히 훌륭하지만 도요타 일가의 무덤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검소하다. 마치 도요타 일족의 결속을 나타내기라도 하듯 높이 50센티 정도의 작은 비석이 나란히 서 있다. 주위에는 어른 키 크기의 장엄한 비석들이 즐비하다. 여기가 도요타 일가의 무덤이라고 누가 말해 주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초라하다. 혼다 소이치로는 후지산 언저리 공원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바로 곁에는 도요타가 2000년 인수한 자동차 레이싱장인 후지 스피드웨이가 있다. '혼다’라고만 적혀 있는 무덤은 의외로 크다. 창업자의 위대함이 그대로 무덤에 나타나 있는 듯하다. 입구에는 내방객을 위한 돌로 만든 명함꽂이도 설치되어 있다. 두 무덤을 보면, 두 회사의 차이가 그대로 나타난다. 도요타 그룹은 창업자인 도요타 사키치(豊田佐吉), 그의 장남 도요타 기이치로(豊田喜一郞) 등으로 이어지는 도요타 일가가 집단으로 도요타 그룹을 지탱하고 있다. 도요타자동직기, 아이신정기 등 그룹 계열사에 일족을 배치한 집단의 위력이 그대로 무덤에서 느껴진다. 2005년 6월 조 후지오(張富士夫) 사장이 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도요타 가문의 4세인 아키오도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그가 언제 사장에 취임할지 궁금증을 더하고 있다. 도요타가 가문을 구심점으로 삼고 있는 데 비해 혼다는 창업자의 위대함이 절대적이다. 지금의 혼다라고 하는 회사의 견실함과 혼다 일족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혼다의 사장 인사에서 혼다 일가 출신자가 화제에 오르내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혼다 소이치로 곁에는 후지사와 다케오라는 희대의 명 보좌관이 있었다. 그의 도움으로 혼다는 현재 ‘세계의 혼다’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성장했다. 하지만 여전히 혼다 소이치로 없는 혼다는 상상할 수도 없다. 만약 ‘혼다를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앙케트 조사라도 한다면, 아마도 제일 먼저 혼다 소이치로라는 단어가 튀어나올 것이다. 2002년 혼다 소이치로의 부인이 살고 있는 도쿄 혼다 저택에서 소이치로 사후 10주년 기념 동상 제막식이 있었다. 이때 참가했던 한 일본 저명인사가 이런 말을 들려준다. 당시 미망인은 “이런 시원치 않은 사람을 존경한다고 동상을 세우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소이치로는 혼다 일가를 경영에 참여시키지 않아 존경을 받고 있지만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는 존경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는 가족을 경영에 참가시키지 않는다는 신념 때문에 자신 못지않게 뛰어난 기술자였던 장남을 지나치게 멀리했다. 장남은 혼다에서 능력을 발휘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고 한다. 오히려 아들이라 역차별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혼다는 집단이 경영하는 도요타에 비해 개인기업과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계속) |
기술지향 혼다, 창업 이래 55년간 적자 없어 |
이공계가 이끌어온 일본제조업 신화(8) |
혼다는 창업 이래 55년 동안 한 번도 적자를 낸 적이 없다. 자동차·오토바이 한 길만 고집했기 때문이다. 버블경제 때 떼돈을 벌었던 닛산 등 일본의 여러 대기업들은 부동산을 사 모으고 관련 없는 다른 사업에 진출했다가 버블이 깨진 후 적자를 내는 등 경영위기가 닥쳤었다. 혼다의 이런 고집 뒤에는 철저한 기술지향주의가 깔려 있다. 역대의 사장 모두가 이공계 출신이라는 것은 혼다의 기술지향주의가 얼마나 철저한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증거다. 기술자 혼다 소이치로의 뒤를 이은 2대 사장으로 1973년 취임한 가와시마 기요시(河島喜好)는 소이치로의 첫 번째 제자다. 소이치로가 사장으로 지명했다. 창업 직후인 1947년에 입사, 동고동락한 후배 같은 사람이다. 당시 혼다는 주식회사도 아니었다(1948년 9월에 주식회사가 됐다). 그는 소이치로에게 매를 맞아가며 기술을 배우는 철저한 도제 관계로 일했다. 힘들 때나 좋았을 때나 고락을 함께 한 측근 중의 측근이었다. 그의 주된 역할은 소이치로의 아이디어를 도면에 옮겨 엔진 설계를 하는 것이었다. 3대 사장은 구메 다다시(久米是志)로 시즈오카대학 기술공학과를 졸업했다. 그 역시 소이치로 밑에서 엔진 개발 업무를 맡았던 기술자였다. 혼다의 초창기 엔진은 모두 그의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토바이에서 시작한 공랭식엔진부터 시빅의 수랭식 엔진까지 그의 기술이 들어갔다. 당시 공랭식 엔진으로 자동차를 만들겠다던 소이치로와 마찰도 많았다. 그는 배기량이 오토바이보다 몇 배나 큰 자동차에 공랭식은 냉각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1960년대 후반 공랭엔진으로 F1에 참가한 차량에서 엔진에 불이 붙는 사건도 있었다. 그는 수랭식 엔진을 강하게 주장했다. 지금 같으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당시만 해도 소이치로는 공랭식 엔진에 승부를 걸고 있었다. 구메는 소이치로와 크게 부딪히곤 사표를 냈다. 하지만 몇 주 후 다시 복직했다. 소이치로와는 부하 직원이 아니라 ‘선생과 제자’ 관계 같은 강한 끈으로 연결돼 있었기 때문이다. 4대 사장은 가와모토 노부히코(川本信彦)다. 도호쿠(東北)대학 대학원 정밀공학연구소 출신이다. 자동차 레이스를 매우 좋아해 혼다에 입사했다. 줄곧 연구소에서 일했던 그는 주로 F1 엔진 개발을 주도했다. 그는 혼다가 1968년을 마지막으로 F1에서 철수한다는 방침을 듣고는 화가 나서 사표를 던졌다. 물론 얼마 있다가 구메 전 사장의 설득으로 다시 복직했다. 역대 사장 두 사람이 사표를 던질 만큼 혈기왕성했던 것은 도요타라면 생각할 수조차 없는 혼다만의 특징이다. 가와모토 사장은 사장 퇴임 후 연구소 특별연구원으로서 개발 현장에 다시 복귀하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상식적으로 사장을 마쳤으면 기업인으로서는 끝이다. 그는 체면이나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그냥 연구가 좋아서 일반 연구원으로 되돌아왔다. 5대 사장은 요시노 히로유키(吉野浩行)다. 동경공업대학 졸업 후 혼다가 자동차를 시작하던 63년 입사했다. 역시 일관되게 연구소 등 개발 부문에서 일했다. 98년부터 2003년 6월까지 사장을 맡아 아시모 로봇을 내놓는 등 새로운 혼다의 비전을 제시했다. 요시노 사장 때는 소이치로가 소리치거나 때리는 일은 없었다. 그래도 연구소를 허둥지둥 뛰어다니며 개발에 몰두하는 소이치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이때까지는 모두 소이치로로부터 훈련을 받은 세대다. 6대는 현 후쿠이 다케오(福井威夫) 사장이다. 와세다 대학 응용화학과를 졸업했다. 그 역시 엔진 개발로 혼다에서 첫 발걸음을 시작했다. 1972년 미국 배기가스 기준에 처음으로 합격한 그 유명한 CVCC 엔진 개발에 참여했다. 미국 혼다 사장을 거쳐 2003년 6월 사장에 올랐다. 이처럼 혼다에는 기술계의 혈통이 계속해서 이어져 흐르고 있다. 이공계 출신이 아니면 사장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불문율이다. 사장 선출 방식도 특이하다. 혼다 창업자인 혼다 소이치로 사장이 73년 물러나면서 사장 후계자를 지목했고 이 같은 후임 사장 지목은 혼다의 전통처럼 내려온다. 후쿠이 사장도 2003년 4월 전임 요시노 사장의 선택을 받았다. 항공기 회사를 꿈꾸던 요시노 사장 요시노 사장과 2003년 4월 혼다의 도치기 트윈링 서킷에서 만나 인터뷰했다. 160센티미터 단구의 그는 눈동자에서 빛을 발하는 강한 카리스마가 인상적이었다. 작은 체구지만 첫눈에 전형적인 일본 엘리트라는 느낌이 강하게 다가왔다. 그는 미국과의 태평양 전쟁 때 미군의 일본 공습으로 가족을 잃기도 했다. 가난 속에 청소년기를 보낸 강인한 일본인이다. 그가 대학을 졸업했던 1960년대 당시 오토바이를 만들고 있던 혼다에 입사한 이유는 특이하다. “일본의 하늘을 맘껏 유린하던 미군의 폭격을 보면서 꼭 저 비행기를 능가하는 항공기를 일본의 기술로 만들겠다는 꿈 때문이었다.” 요시노 사장은 혼다를 세계적인 자동차업체로 견인했다. 남은 꿈은 무엇일까. 소이치로와 함께 꿈꿨던 항공기다. 요시노는 사장이 되고 나서 항공기 사업부를 재건했다. 그리고 본격적인 항공기 개발에 들어갔다. 그의 꿈은 사장을 그만두고 고문직을 맡았던 2003년 12월 17일 이뤄졌다. 라이트 형제가 하늘을 난 지 꼭 100년 만에 혼다의 기술로 만든 제트기가 시험 비행에서 완벽히 성공한 것이다. 저승에서 혼다 소이치로는 이제서야 자신의 꿈이 이뤄졌다고 눈물을 흘릴지 모른다. 혼다는 2010년께 항공기 제조 사업 부분을 추가할 가능성이 높다. 이제 자동차 회사가 아니라 본격적인 모빌리티 컴퍼니를 위해서다. 소이치로와 함께 땀 흘려 일했던 마지막 혼다의 사장인 요시노 .이제 그는 도요타와의 경쟁을 위해 남은 시간을 소이치로의 분신으로서 살 것이다 |
매출액의 5%가 연구개발비, 세계 최고 수준 |
이공계가 이끌어온 일본 제조업신화(9) |
후쿠이 사장과는 인연이 깊은가 보다. 혼다의 후쿠이 사장은 전임 요시노 사장과 키와 외모가 비슷한 데다 근성까지 닮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전임 요시노 사장이 맡았던 주요 보직을 그가 그대로 물려받았다고 한다. 그는 자동차 엔진부터 시작해서 연구소 사장, 모터사이클, 레이싱 사업 등 혼다에서 해볼 만한 것은 다 해봤다고 한다. 회사 이사를 하다가 공장장으로, 그러다가 미국 지사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혼다의 목표는 수입차 시장 1등입니다. 이를 위해 우선 도요타 렉서스를 넘어서는 서비스를 선보여 고객의 입에서 ‘혼다차 사기를 잘했다’는 칭찬이 나오도록 하겠습니다.” 후쿠이 사장과의 인터뷰 전문 - 혼다의 한국 진출 의미는. “서비스와 고객만족도 역시 중요한 요소입니다. ‘사는 기쁨, 파는 기쁨, 만드는 기쁨’이라는 혼다이즘을 한국에서 지속적으로 실현하겠습니다.” - 혼다는 사람처럼 두 발로 걷는 로봇 ‘아시모’를 개발했는데. “아시모는 사람이 갈 수 없는 곳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인간의 분신입니다. 단순히 사람의 흉내를 내는 엔터테인먼트용 로봇이 아닙니다. 20년 전 사람처럼 걷는 족립형 로봇을 개발할 때만 해도 ‘불가능하다’는 논문이 나왔습니다. 혼다는 12년에 걸친 연구 끝에 성공했지요. 아시모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나온 화상인식이나 인공지능 기술은 자동차 개발에 직접 연결됩니다. 아시모 기술은 컴퓨터 발전에 의존하고 있어 연료전지 자동차가 보편화되는 것보다 더 빨리 소비자를 찾아갈 수도 있습니다.” - 제트기 시험 비행에 성공했는데 사업 계획은. “창업자인 혼다 소이치로의 꿈이 이뤄진 것입니다. 혼다는 처음부터 비행기회사를 꿈꿨습니다. 혼다의 기술이 들어간 제트기 엔진이 선보일 것입니다. 이 제트 엔진은 인증 등 각종 인허가 관계로 미국 GE에서 위탁 생산합니다.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최고 수준의 연비와 저 배출 가스를 기록할 것입니다.” - 연구 개발 투자를 많이 하고 있는데 혹시 주주 불만이나 경영상 문제는 없는지. “연구개발비는 매출액의 5퍼센트로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연구비 과다 등의 주주 불만은 전혀 없습니다. 단 ‘왜 최근 F1 레이스에서 1등을 못하냐’는 소리는 듣기도 합니다.(웃음)” - 혼다는 해외 생산이 전체의 55퍼센트(2004년 300만 대 중 170만 대)를 넘는 등 글로벌 기업으로 유명합니다. 경영전략은 무엇입니까. “기술력 향상·품질관리·혼다의 브랜드 관리(모티베이션)입니다. 다른 회사와 다른 점은 몇 대를 판다던지 하는 식의 수치 목표를 정하지 않는 겁니다. 수치보다는 본질적인 것을 제대로 관리하면 브랜드 이미지가 좋아지고 고객만족도가 커져 계속 성공할 수 있습니다.” - 미래의 자동차는 어떻게 될지. “한마디로 환경 자동차입니다. CO2 배출가스를 대폭 줄이는 수소 연료전지 자동차입니다. 배출가스가 물뿐이니까 공해 문제는 없겠죠. 그렇다고 가속력이 떨어지면 안 됩니다. 혼다는 자동차를 타면서 느끼는 운전의 즐거움은 그대로 유지할 겁니다.” - 세계 자동차 업체들은 90년대 중반만 해도 생산대수 경쟁이었습니다. 작은 회사는 망한다며 인수·합병(M&A)을 통해 덩치 키우기에 급급했습니다. 앞으로 세계 자동차업계 지도는 어떻게 될 것이라고 봅니까? “한때 대형 M&A가 이뤄져 ‘400만 대 클럽(연간 생산)’에 가입하지 못하면 망한다는 말도 나왔습니다. 지금은 현대차나 혼다, BMW 등 이에 못 미치는 회사들이 이익을 내고 잘 살고 있습니다. 오히려 덩치를 키운 기업들이 세력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규모가 크다고 강한 것은 아닙니다. 혼다는 생산대수를 늘리는 볼륨 경쟁이 경영의 우선순위가 아닙니다. 혼다의 브랜드 가치를 극대화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혼다는 계속 생존할 수 있습니다.” (계속) |
99퍼센트의 실패를 커버한 1퍼센트의 성공 |
이공계가 이끌어온 일본제조업 신화(10) |
혼다 기술의 핵은 도치기(栃木)현 모테기(栃木)에 위치한 혼다기술연구소다. 혼다는 일본에 3개, 미국, 독일, 영국, 태국 등 해외에 5개의 기술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기술 개발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수익성과 거리가 멀다. 새로 개발한 기술을 실용화해도 이익을 낼지 알 수 없다. 특히 기초 연구나 실험성이 강한 연구일수록 더 그렇다. 그러나 기초 연구를 소홀히 하고 응용 연구만 집중하면 개발력이 떨어진다. 경쟁 업체의 기술을 따라잡는 수준이거나 흉내 내는 수준으로 전락하기 쉽다. 개발이라는 속성상 사전에 계획해서 얼마를 투자해 얼마를 회수할지 예상할 수 없다. 99퍼센트의 실패 뒤에 1퍼센트의 성공을 기대할 정도다. 그 실패를 흡수할 수 있는 체제를 보장하지 않으면 개발을 우선하는 기술기업으로 살아남기 어렵다. 이 같은 이유 때문에 혼다는 연구소를 아예 본사에서 분리해 독립법인으로 운영한다. 가능하면 수익에 관계없이, 연구개발 활동을 자유롭게 진행하겠다는 의지다. 물론 연구소 운영비는 모두 혼다 매출에서 나온다. 본사에서 연구개발 부문을 두고 있으면 상품화에 따른 수익성을 무시할 수 없다. 영업부문이나 그 외의 부문에서 개발에 대한 참견도 많아진다. 그렇기 때문에 대다수 기업들이 완벽한 기술보다는 어중간한 단계에서 상품화시키는 경우가 종종 일어난다. 혼다기술연구소는 별도 법인이라 판매나 상품화의 압력을 덜 받는다. 완전히 받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다른 회사보다 개발에 전념할 수 있는 강점이 있다. 혼다는 기술 개발로 이익을 남기는 전형적인 기술 개발형 기업이다. 그래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것은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는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과 마찬가지다. 실패의 경험을 축적해 다음 단계에는 성공을 향해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기업 문화로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에 혼다는 독창적인 기술을 선도해온 기업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독창적인 혼다 기술 소이치로는 기술의 독창성을 지속적으로 추구했다. 60년대 중반 처음으로 승리했던 F1에서도 독자 기술을 포함시킨 부품을 사용하지 않으면 출전시키지 않았다. 그런 창업자의 자세를 부하 직원들이 곁에서 지켜봤다. 연구개발에 몰두하는 자세와 기술의 독창성을 몸으로 가르친 것이다. 그 부하들이 성장해 또 자신의 부하들에게 그 자세를 가르친다. 소이치로의 유전자가 맥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혼다의 독창적인 기술은 다양한 분야에서 성공을 거뒀다. 4륜 조향차(4WS)라고 불리는 4륜 방향 시스템은 세계 최초로 혼다가 개발한 것이다. 자동차는 회전할 때 모두 앞바퀴만 사용한다. 브레이크나 4륜구동은 뒷바퀴를 이용하지만 핸들 조작은 모두 앞바퀴뿐이다. 전륜구동(FF)차는 회전과 동력을 모두 앞바퀴에 집중해 부담이 커진다. 따라서 뒷바퀴를 핸들로 조작할 수 있다면 보다 경쾌하고 정확한 핸들 조작이 가능할 것이라는 발상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4WS이다. 혼다는 1980년대 중반에 세계 처음으로 위성을 사용해 자동차의 위치 정보와 길 찾기를 안내해주는 자동차 네비게이션 시스템도 개발했다. 앞에서 말했던 로봇 ‘아시모’ 도, 하이브리드 카도 혼다의 독자기술이다. 혼다의 자동차 엔진은 오토바이의 공랭식 기술을 바탕으로 시작했다. 이런 배경 때문에 혼다 엔진은 고회전에서 높은 출력을 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대표적인 엔진이 지금도 사용하는 VTEC(가변밸브) 엔진이다. 이 엔진은 고속에서 연료를 공급하는 밸브가 보통 때보다 더 많이 열려 그만큼 힘을 더 낼 수 있다. 그래서 가변밸브라고 부르는 것이다. VTEC 엔진을 처음 장착한 것은 1989년 스포츠카 타입인 ‘인테그라’ 모델이었다. 이 엔진은 1983년에 발족한 연비향상 연구팀이 개발을 시작했다. 당시 목표는 1리터당 100마력, 8천 회전이었다. 이는 기존 엔진의 출력보다 20퍼센트를 상승시키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 경량화에 내구성까지 극한을 추구하지 않으면 실현할 수 없는 목표였다. 당시 엔진 제조나 소재 기술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때문에 개발진은 목표를 너무 높게 설정한 것이 아닐까 하고 답답해했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 불평하지 않았다. 기술자의 본능인 한계에 도전하는 정신 때문이었다. 3년의 연구 끝에 고출력, 고마력, 저연비라는 세 마리의 토끼를 잡은 DOHC-VTEC 엔진이 개발됐다. 이 엔진은 후에 시빅, 어코드, NSX 등 혼다의 주력 차종에 모두 장착됐다. 독창적인 기술일수록 다양한 응용이 가능하다. VTEC 엔진은 진화를 계속해 저속, 중속, 고속의 3단계에서 캠을 나눠 사용하는 3단계 VTEC 엔진으로 발전했다. 또 다른 형태는 VTEC-E(이코노미) 엔진이다. 저회전에서 흡기밸브 한 개를 중지시키면 실린더 연소실에서 기체 소용돌이가 만들어지고 연료 밀도가 묽어져 저 연비를 실현할 수 있게 된다. 이 엔진은 흡기밸브의 개폐 타이밍을 엔진회전수와 그 때의 출력에 따라 변화하는 ‘i-VTEC’ 으로도 발전했다. 현재 인스파이어와 뉴 오딧세이 등에 장착되어 있다. 소이치로는 ‘성공은 99퍼센트의 실패 위에 있는 1퍼센트다’ 라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했다. 바꿔 말하면, 1퍼센트가 성공하면 99퍼센트의 실패도 커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증명한 것이 혼다의 VTEC 엔진 개발이다. (계속) |
실패의 철학과 UFO의 꿈 |
이공계가 이끌어온 일본 제조업 신화(11) |
혼다에는 ‘올해의 실패왕’이라는 포상 제도가 있다. 연구자 중에 가장 큰 실패를 한 사람에게 100만 엔을 수상한다. 소이치로는 실패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나는 우리 사원이 강직한 사람이 되는 것도 좋지만, 자신이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을 생각해서 해보고, 그리고 결과가 좋지 않았다면 다음에 그런 실패를 기초로 새로운 것을 개발했으면 한다.” 그의 가장 큰 꿈 가운데 하나는 ‘UFO’였다. UFO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고 싶다고 자주 얘기했다. 그와 UFO에 얽힌 이야기 가운데 필자가 들었던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한다. 1980년대 혼다의 경력사원 면접에서 있었던 일화다. 소이치로는 경력사원 면접장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여러분이 혼다에 입사해 무엇을 만들고 싶냐’는 것이었다. 그 중 한 사람이 ‘UFO를 만들고 싶어 혼다에 지원했다’고 대답했다. 그 날 면접에 참석한 임원들은 모두 ‘그 친구 떨어졌어’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 그 사람은 소이치로의 맘에 들어 입사했다. 그는 UFO를 만들지는 못했지만 그런 소이치로의 기대에 부응, 새로운 발상으로 훗날 임원까지 올랐다. 참으로 소이치로다운 채용이었다. 실패는 숨겨야 하는 것이 아니라 훈장감 도요타에는 이런 말이 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혼다는 한술 더 떠 아예 ‘실패하라’라고 말한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표현보다는 긍정적으로 실패하라고 하는 편이 더 자연스럽게 연구에 몰두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다. 이런 실패의 철학은 그냥 생겨난 것이 아니다. 2000년대 혼다는 최강의 기술을 바탕으로 역대 최고의 경영실적을 내고 있지만 창업 때부터 아무런 어려움 없이 도달한 것은 아니었다. 여러 가지 실패와 몇 번의 부도 위기를 극복하면서 현재의 혼다로 거듭났다. 단지 자동차 판매가 좋다, 나쁘다 만의 변동은 아니었다. ‘전해주고 싶은 것 도전 50년’이라는 혼다 사사(社史)에는 이런 내용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일반 회사와 다른 것은 성공 스토리만 아니라 실패까지 숨김없이 적고 있다는 점이다. 그 책에는 경영 위기에 빠졌던 일,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또 공랭식과 수랭식을 둘러싼 논쟁 등 여러 가지 실패가 적혀 있다. 혼다에 있어서 실패의 역사는 숨겨야 하는 것이 아니라 훈장이라는 것이다. 이는 혼다가 기술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회사라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기술은 99번의 실패 뒤에 1번의 성공이 있다’는 소이치로의 유전자가 경영방침에서도 계승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위기에 직면했을 때의 적절한 대응에 대한 가르침이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책임을 회피할지, 정면으로 당당하게 책임을 질지에 대해서 설명한다. 혼다는 언제나 후자를 택했다. 최초의 경영위기는 1954년이다. 당시 소형 오토바이가 겨우 팔려 회사를 꾸려 나가고 있었다. 새로 나온 신제품은 무거운 데다 힘이 달리고 클러치에 문제가 있어 시장에서 좋은 평을 듣지 못하고 있었다. 소이치로는 오토바이 품질을 한 단계 끌어올리기 위해선 성능 좋은 값비싼 외국제 공작 기계를 사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당시 자본금 6백만 엔인 혼다가 4억5천만 엔이나 하는 최신 기계를 수입해야 했으니 자금 사정이 좋을 리 없었다. 재무를 담당한 후지사와 부사장은 자금 사정을 들어 반대할 만했지만 그의 배짱은 대단했다. 품질을 올리는 설비 투자에는 두말없이 결재를 해 주었다. 문제는 판매가 시원찮아 자금 융통이 어려워진 데다 해외에서 구매한 공작기계 결재 날짜가 점점 다가오는 것이었다. 첫 부도 위기였다. 그런데도 소이치로는 자금난이 언제 있느냐는 듯 태평하게 오토바이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기술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사태를 수습하러 나선 후지사와는 조용히 부품 업자를 불렀다. 그간 사정을 설명하고 이제부터는 당분간 부품 대금의 30퍼센트밖에 지불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미쓰비시은행에 긴급 융자를 요청했다. 미쓰비시은행은 믿기지 않을 만큼 선선히 후한 지원을 약속했다. 혼다의 꿈과 장래성을 높게 산 것이다. 그때의 일을 고맙게 여겨서인지 늘 편한 복장을 즐겨 입던 소이치로도 미쓰비시은행장을 만날 때만큼은 반드시 넥타이를 매고 나갔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30퍼센트 대금 지불을 거래처가 납득하고 은행이 혼다 지원을 결정했던 것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다. 혼다는 도산 위기에 처하고도 당시 최고의 오토바이 레이스로 불린 ‘만도 TT레이스’에 참가선언을 했다. 꿈에 대한 도전이었다. 만도 TT레이스*(International Tourist Trophy Race)는 1906년에 영국의 만도(Isle of Man)에서 시작된 세계 최초의 모터사이클 레이스로 당시에도 미국, 유럽을 오가며 열리는 세계 최고 수준의 레이스였다. (*1906년 영국의 오토바이 스포츠 단체 ACC(Auto Cycle Club:현재의 ACU:Auto Cycle Union)는 국제로드레이스를 계획하였다. 목적은 오토바이로 경주하는 것과 실용적이며 신뢰성이 있는 오토바이의 개발을 촉진하는 데에 있었다.) “내가 회사를 창립하고 5년 만에 획기적인 발전을 달성한 것은 전 종업원의 노력의 결정으로 이에 감사한다. 내 어릴 때 꿈은 혼다가 제작한 오토바이로 전 세계 자동차 레이스에서 우승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 패자(覇者)가 되기 전에 먼저 기업을 안정적으로 꾸려가고 정밀한 설비와 우수한 설계로 양질의 오토바이를 국내 소비자에게 공급하려고 노력해왔기 때문에 오토바이 레이스에는 전력을 쏟을 틈도 없었다.(중략) 이제 호기를 맞았다. 오늘이야말로 내년의 만도 TT 레이스 출장할 결의를 다지려 한다.” 격문(檄文)에 가까운 선언이었다. 일본 업체는 이 레이스에서 단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다. 구불구불 어려운 코스에다 진흙길도 주행해야 했다. 엔진의 출력뿐 아니라 내구성이 떨어지면 완주조차 어려운 경주였다. 그런데 이 험난한 레이스에 자금 위기에다 부품 결함으로 판매 상황까지 나쁜 혼다가 이런 선언을 했으니 좋게 말하면 꿈에 대한 도전이고 나쁘게 말하면 허세에 불과했다. 현실적으로 레이스에 나갈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선언 직후 소이치로는 각오를 다지기 위해 유럽으로 출장을 떠났다. 만도TT 레이스를 보기 위해서였다. 실제 레이스에 참가한 것은 5년 후인 1959년이었다. 소이치로의 공언대로 혼다는 만도 레이스에서 일본 자동차 역사에 길이 남는 기적 같은 우승을 일궈냈다. 세계 최고의 대회에서 말이다. 거래업체와 은행은 혼다가 경영 위기에 닥쳤지만 일시적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여유(실제로 소이치로 출장 여비를 챙기는 것도 어려웠다)를 보면서 혼다는 다시 일어설 것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소이치로의 꿈을 담보 삼아 지원을 약속한 것과 마찬가지다. (계속) |
천재는 없다, 소이치로를 버려라 |
이공계가 이끌어온 일본제조업신화(12) |
소이치로라는 한 사람의 천재에 의존하는 개발체제는 오래가지 않는다. 시빅 개발에서 시작한 혼다의 독특한 ‘이종 병행개발’ 방식은 혼다의 개발체제로 확고한 뿌리를 내렸다. 개발 초기단계 때 두 개의 개발 팀을 두고 독자적으로 개발시켰다. 30대 후반의 베테랑 조(組)와 30대 전후의 젊은 조 약 열 명씩 두 개의 팀으로 나눠 서로 안을 내게 했다. 얼마 후 나온 개발안은 세부적으로 달랐지만 기본적인 컨셉은 같았다. ‘누구나 처음 차를 살 때 선택할 수 있는 엔트리 카로 가볍고 컴팩트한 느낌을 줘야 한다. 또 잘 달려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이후 두 팀의 개발진척도를 비교해 보다 우수한 팀으로 흡수했다. 시빅의 성공으로 이 같은 개발 방식은 1970년대 이후 혼다의 기본 개발 시스템으로 자리 잡았다. 이런 방식의 전환은 소이치로라는 천재에 의존했던 기존 시스템을 부정한 것이다. 한 사람의 천재에 의존하지 않고, 팀 전원이 기술개발에 참여한 것이다. 혼다가 대기업으로 거대화하면서 개인의 능력에 의존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사장이 도면을 들고 엔진 실린더 길이나 위치 하나하나를 참견해서는 대기업으로서 살아남을 수 없다. 사원 수십 명 정도의 작은 회사라면 가능하지만 70년대 초반 혼다는 종업원만 1만7천명이 넘었다. 소이치로의 항복, 공랭식 엔진 경영위기를 넘긴 혼다는 1971년 안정을 찾았다. 획기적인 저공해 CVCC 엔진이 세계 처음으로 미국의 배기가스 규제법안인 머스키법을 만족시켰기 때문이다. 여기에 혼다는 그 기술을 다른 자동차업체에 공개하는 대대적인 기자회견을 했다. 경영 위기로 실추됐던 기업 이미지를 회복하는 좋은 기회였다. 고객들 사이에서 ‘역시 혼다 기술은 대단해’라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더구나 대단한 기술을 공개한 것 역시 환경을 배려하는 기업 이미지로 이어졌다. 혼다 성공의 초석이 된 수랭식 CVCC 엔진 개발 뒤에는 기술자 소이치로가 은퇴를 결심하는 중대한 ‘항복’이 있었다. 소이치로는 자동차 엔진도 오토바이에서 사용하는 공랭식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토바이보다 배기량이 2,3배 큰 자동차 엔진을 공랭식으로 열을 식히기에는 무리가 뒤따랐다. 더구나 자동차 배기량이 1천cc를 넘어 2천cc급까지 커지기 시작한 때였다. 좀처럼 해결하기 어려운 방식이었다. F1 레이스에 참가한 공랭식 엔진에 불이 붙기도 했다.젊은 기술자들은 소이치로의 고집에 고개를 젓고 있었다. 소이치로는 공랭식 1천300cc 엔진인 ‘H1300’이 실패한 후에도 젊은 연구원을 붙들고 공랭 기술에 몰두했다. ‘공랭식 이외에는 엔진이 아니다’라고 할 정도였다. ‘세계 어떤 자동차 업체도 다루고 있지 않다’라는 점과 ‘개발이 어렵다’는 이유로 소이치로는 더 고집을 피웠다. 장애물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그의 투지는 더 강해졌다. 사내 누구도 그를 거역하지 못했다. 문제는 공랭식 엔진 개발을 부여받은 소이치로의 제자들이었다. 공랭식 엔진은 어떻게 해도 배기가스 규제치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공랭식을 계속하다가는 회사가 다시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높아졌다. 배기가스 규제에 맞는 엔진이 성공하지 못하면 망할 수도 있었다. 답은 수랭식 엔진밖에 없었다. 그러나 완고한 소이치로는 수랭식을 허락하지 않았다. 회사를 걱정하는 기술자들이 몰래 수랭식 엔진 개발에 착수했지만 숨어서 하는 것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새로운 엔진 개발에는 보통 4,5년이 걸린다. 더구나 이제까지 다룬 적이 없었던 수랭식 엔진을 3년 만에 개발해 시장에 내놓으려면 시간이 턱없이 모자랐다. 점점 수랭식은 연구소 전원의 의사로 굳혀졌다. 연구소에는 소이치로 충성파도 상당수라 의견이 갈리는 소동이 뒤따랐지만 결국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이냐’로 정리되고 만 것이다. 1969년 8월 당시 스기우라 히데오(杉浦英男) 연구소장이 소이치로를 만났다. “어떻게 해도 공랭식으로는 미국의 배기가스 규제를 맞출 수 없습니다. 수랭식을 하게 해주세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얼마쯤 있다가 소이치로가 불쑥 말을 뱉었다. “너희들이 이겼다.” 카리스마를 휘두르는 ‘독재자’가 한 사람의 범인으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또한 그것은 한 노령의 기술자가 은퇴를 결심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소이치로는 이제 자신의 방식으로는 젊은 연구원들의 머리를 넘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당시 새로 개발된 컴퓨터를 전혀 사용할 줄 몰랐던 것이다. 이제 혼다기술연구소는 소이치로를 넘어섰다. 남은 목표는 머스키법을 통과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3년 후인 1972년 CVCC 엔진이 개발됐다. 세계서 처음으로 성공한 저공해 엔진이었다. 소이치로의 가르침 소이치로는 “공해 방지와 관련한 신기술은 모두 공개한다.” 라는 독특한 철학을 갖고 있었다. 이 같은 이유로 혼다는 2000년 연료전지차량의 사양을 공개하는 결단을 내린다. “배기가스 규제는 자동차 업체가 맡아야 할 사회적 책임이므로 이에 맞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은 의무다.” 1972년에 공개한 CVCC 엔진 기술 역시 혁신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세계에서도 유례없이 엄격했던 배기가스 규제치인 ‘미국 머스키법’은 어떤 업체도 달성하기 어려웠다. CVCC는 엔진에 부연소실을 만들고, 최적의 연소를 할 수 있도록 기술적으로 컨트롤한 방식이었다. 그리고 기존 엔진에서 실린더의 헤드 윗부분을 교환하기만 하면 가능해 어떤 엔진에도 적용할 수 있었다. 230건의 특허를 낸 그 엔진은 도요타에 기술 제공 계약을 맺기도 했다. 그 후 포드, 크라이슬러, 이스츠 등 다른 업체에도 기술을 제공했다(GM에는 아예 엔진을 공급한다는 소리도 나왔지만 혼다에 추가로 엔진을 더 만들 여력이 없어 실현되지는 못했다). 자동차 전문가들은 “획기적인 기술을 공개한 것은 바로 혼다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공해대책 기술을 공개하는 것이 자동차 업체로서 사회적 책임이라는 입장을 견지해왔기 때문이다. 소이치로의 유산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만족할 줄 모르는 도전 정신. 철저히 독창적인 것을 만든다. 단념하지 않는다. 높은 뜻(꿈)을 갖는다.” 물론 이 세 가지 정신의 밑바탕에서는 환경을 위한 기술 공개와 같은 ‘정도(정도)를 가는 정신’이 있다고 볼 수 있다.(계속) |
/중앙일보 김태진 기자, 니혼게이자이 한국특파원 스즈키 쇼타로 |
흰색 작업복은 소이치로의 혼, 스즈카 공장 |
이공계가 이끌어온 일본제조업신화(18) |
혼다의 창업자인 소이치로의 분신들이 일하고 있는 스즈카 공장은 나고야에서 버스로 약 한 시간 반 정도 걸린다. 나고야와 오사카를 잇는 메이한 고속도로를 한 시간 정도 달려 스즈카 인터체인지를 나왔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30여 분 시골길을 지나간다. 풍력 발전기와 녹차 밭이 군데군데 보인다. 스즈카는 녹차 재배로도 유명하다. 한적한 시골길 사이에 갑자기 공장 건물이 나타난다. 스즈카 공장은 혼다 공장 가운데 규모(27만 평)가 가장 크다. 세계 최고 수준의 생산성을 기록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1960년에 문을 열어 오래된 공장인데도 불구하고 청결 상태가 상당히 좋다. 스즈카 공장에는 혼다 소이치로의 혼이 담겨 있다. 자동차 사업을 준비하던 1950년대 후반, 그는 공장을 짓기 위해 여러 곳의 후보지를 보러 다녔다. 토지를 보러 간 소이치로 뒤에는 지역의 현(縣) 의원이나 시 의원 또는 토지 관계자들이 죽 뒤를 쫓아와 토지에 대한 설명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접대자리를 마련하는 데 집중했다. 그리고는 소이치로에게 그럴듯한 조건을 제시하며 “이쪽으로 해 달라”고 청탁했다. 그럴 때마다 소이치로는 버럭 화를 내고는 문을 박차고 나가 돌아가버리곤 했다. 그러면서 “나는 대접을 받고 싶지 않아. 공장을 짓고 싶은 것이지”라고 했다. 공장 후보지의 의원으로서는 상식적인 접대를 하는 것이었지만 그런 상식이 그에게 통하지 않았다. 스즈카 후보지에 갔을 때다. 스즈카 시청에선 그런 접대가 없었다. 차가운 녹차 한 잔이 나왔을 뿐이다. 안내하는 시장도 양복을 입지 않고, 작업복 그대로 안내했다. 또 토지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후보지가 어디부터 어디까지인지 알기 쉽게 깃발을 세워 놓는 등 효율적인 시찰이 가능하도록 세심한 준비를 했다. 그는 토지를 보자마자 스즈카로 결정했다. 이렇게 시작한 것이다. 창업자들은 미래를 보는 눈과 결단력을 갖고 있는가 보다.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도 부산 영도 개발이 철새 때문에 진척이 없자 “철새들이 밥 먹여 주나”하면서 밀어붙였다. 소이치로는 한눈에 스즈카 부지를 결정한데 이어 이번에는 공장 건설의 전권을 당시 생산기술 과장인 39살의 말단에게 맡겼다. 회사의 운명을 좌우할 최신예 공장 건설 프로젝트를 일개 과장에게 맡긴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소이치로의 ‘사람을 보는 눈’이다. 그는 담당 과장에게 “돈은 얼마든지 써도 좋다. 그 대신 2년 후에 완벽한 차를 생산할 수 있도록 공장을 완공해라.”라고 주문했다. 그것 이외에는 다른 조건은 없었다.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약속도 했다. 기대에 걸맞게 담당 과장은 그런 난제를 보기 좋게 해결했다. 바로 1960년 4월 스즈카 공장을 완공한 것이다. 흰옷 입은 소이치로의 분신들 스즈카 공장 곳곳마다 온통 하얀 작업복을 입은 근로자뿐이다. 웬 자동차 공장에 흰색 작업복인가. 기름때가 많은 자동차 공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듯했다. 이는 창업자 소이치로의 영향 때문이다. 소이치로는 창업 시절 평소 하얀 옷을 입고 오토바이 수리를 했다. 하얀 옷을 입으면 더러움이 쉽게 보여 다시 갈아입게 된다. 따라서 정갈한 마음으로 일하고 고객을 맞을 때도 깔끔하게 보일 수 있었다. 또 흰옷을 입고 작업하면 마음까지 단정해져 보다 품질에 완벽을 기할 수 있었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자동차를 만드는 작업자는 의사와도 같다는 소이치로의 철학이 들어간 흰색 작업복이다. 공장을 방문하는 본사 직원이나 연구소 직원도 마찬가지로 공장에 오면 흰색 상의로 갈아입는다. 사장도 예외가 없다. 공장은 자동차를 만드는 신성한 장소이기 때문이란다. 점심시간 흰색 작업복을 입고 쏟아져 나오는 수백 명의 근로자 무리들. 바람에 떨어지는 사쿠라 꽃잎처럼 보인다. 혼다이즘의 신자들이다. 그들의 손기술에서 혼다의 정교함이 묻어 나오고 있다. 흰색 작업복엔 또 다른 특징이 있다. 버클을 단 벨트 대신 끈을 사용해 옷을 조인다. 단추 역시 바깥쪽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했다. 이는 조립과정에서 흠집을 내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작업복을 갈아입거나 할 때도 다치지 않게 하려는 배려도 깔려 있다. 현재 이 작업복은 일본 공장뿐 아니라 세계 33개국 62개 혼다 공장 모두에서 착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되기까진 우여곡절이 많았다. 80년대 초반 미국 오하이오 공장 설립 당시의 일이다. 개성이 강하고 사생활을 엄격히 고수하는 미국인들은 전원 동일한 백색 작업복을 입는 것에 불만이 많았다. 미국에선 흰색 옷이라고 하면 의사 아니면 페인트공이나 입는다는 것이다. 또 개성이 강한 만큼 자기가 좋아하는 색상의 작업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특히 패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여성은 절대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일본에서 온 혼다 파견자들은 반대자들과 식사를 같이 하면서 성의를 다해 ‘백색 작업복의 의미’를 설득했다. 그런 열의에 미국 작업자들이 하나 둘 이 작업복을 입기 시작했다. 처음엔 “단순한 보통의 작업복 아닌가?”라고 생각했던 종업원들이 매일 입다 보니 “아, 이게 바로 혼다의 인간존중을 상징하는 것이군.” 이라고 생각이 바뀌었다. 또 일하면서 점점 ‘혼다는 좋은 회사군’ 하는 생각이 들게 된 것도 작업복 덕분이라고 말하는 엔지니어들이 생겨나면서 흰색 작업복으로 통일됐다. 지금은 전 세계 혼다 공장의 단일 유니폼이다. 작업복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국의 쑥스러운 사례를 하나 소개한다. 대우차 매각이 막바지에 다다랐던 2001년 얘기다. 매년 파업을 되풀이해오던 근로자들이 매각 위기에 닥치자 모처럼 파업 없이 새로운 각오로 일하기 시작했다. 필자는 대우차 부평 공장에 그런 분위기를 취재하러 갔었다. 당시 공장은 휴지 한 조각 볼 수 없을 정도로 깨끗했다. 또 근로자와의 인터뷰에서도 매년 반복했던 파업에 대한 후회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다음 날 공장 조립라인 사진과 함께 ‘새로 다진 각오로 대우차 살리기에 나선 근로자’라는 기사가 나갔다. 문제는 사진에서 나왔다. 한 중소기업 사장이라는 독자의 전화를 받았다. “사진 속의 대우차 근로자를 보면 아직 정신을 차리지 않은 것 같다. 신발을 꺾어 신고 일을 하는 근로자가 만든 차를 누가 타겠는가.”라는 질타였다. 사진을 확인해 보니 필자가 찍은 사진 속의 근로자 한 명이 신발을 꺾어 신은 채 자동차를 조립하고 있었다. 물론 그 독자의 지적이 틀릴 수 있다. ‘신발 꺾어 신은 것이 생산성이나 품질에 무슨 영향을 미치겠는가’ 하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혼다 공장의 흰옷 입은 작업자를 보면서 필자는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작업자의 복장은 생산성이나 품질과 직결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소이치로의 혼이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계속) |
/중앙일보 김태진 기자, 니혼게이자이 한국특파원 스즈키 쇼타로 |
꿈의 혼다 ‘인간존중의 경영이념’ |
이공계가 이끌어온 일본 제조업 신화(24) |
혼다의 경영이념은 ‘인간존중’과 ‘세 개의 기쁨’으로 대표한다. 인간존중이란 개인의 개성을 서로 존중하고 평등한 관계에서 신뢰하고 이를 바탕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일해서 기쁨을 함께 누린다는 조금 복잡한 의미를 담고 있다. 자동차는 사람이 편리하기 위해 타는 것이다. 따라서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과 자동차 제조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연관성이 크다. 혼다가 자동차를 만들 때 환경오염 문제를 가장 많이 신경 쓰는 것도 그런 이유다. 세 개의 기쁨은 ‘사는 기쁨, 파는 기쁨, 만드는 기쁨’이다. 혼다의 종업원은 단순히 월급을 받기 위해 일을 하는 것 보다는 자동차가 좋아서, 그런 자동차를 만드는 혼다가 좋아서 일을 하는 경우가 대다수라고 한다. 혼다의 사시(社是)는 독특하다. ‘우리들은 세계적인 시야를 갖고 전 세계 고객을 만족시키기 위해 품질 좋은 상품을 적정한 가격으로 공급하는 것에 전력을 다 한다’라고 되어 있다. 적정한 가격으로 공급한다는 것은 운전의 즐거움을 주는 고성능 차를 추구하면서도 가격은 누구나 살 수 있는 대중차로 만들겠다는 방침으로 이어진다. 전 세계 1퍼센트만이 살 수 있는 럭셔리카보다는 성능 좋은 대중차를 만들겠다는 생각이다. 1992년 창업자 소이치로 사후에 그의 유지를 받들어 일부 수정한 회사 경영 방침을 보자. 좋은 차를 잘 만들겠다는 경영이념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①항상 꿈과 젊음을 유지할 것. ②이론과 아이디어와 시간을 존중할 것. ③일을 사랑하고 커뮤니케이션(직장 분위기)을 소중히 할 것. ④조화로운 일의 흐름을 만들어 낼 것. ⑤끊임없는 연구와 노력을 잊지 않을 것. 다섯 가지 기본이념에는 소이치로의 창업 때부터 이어져 온 혼다의 유전자가 그대로 녹아 있다. 이런 유전자는 경영 곳곳에 전수됐다. 혼다는 능력 있는 신입사원에겐 과감히 권한을 준다. 젊은 층에 인기 있는 스포츠카 인테그라 디자인은 20대 디자이너가 팀장을 맡기도 했다. 인사 시스템도 독특하다. 일본의 종신고용제와 단일호봉제를 기본으로 삼아 미국식 연봉제를 가미했다. 1992년에는 일본 대기업 중 가장 먼저 연봉제를 도입했다. 직급과 직위도 분리했다. 혼다 직원들의 명함을 받으면 팀장 이하는 모두 팀원이다. 과장이라는 명칭은 직급일 뿐이다. 팀장 밑에 수많은 과장들이 팀원으로 일하고 있다. |
/중앙일보 김태진 기자, 니혼게이자이 한국특파원 스즈키 쇼타로 |
댓글 없음:
댓글 쓰기